엑스트라 / 정해종

 

   그냥 지나가야 한다
   말 걸지 말고
   뒤돌아보지 말고
   모든 필연을
   우연으로 가장해야 한다
   누군가 지나간 것 같지만
   누구였던가에 관심 두지 않도록
   슬쩍 지나가야 한다
  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기억에도
   남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
 
   그냥 죽어야 한다
   경우에 따라선
   몇 번을 죽을 수도 있지만
   처절하거나 장엄하지 않게
   삶에 미련 두지 말고
   되도록 짧게 죽어야 한다
   잊지 말아야 할 것은
   그 죽음으로
   살아남은 자의 생이 더욱
   빛나야 한다는 것이다
 
   인생이란 배당 받는 것이다
   주어진 생에 대한 열정과 저주,
   모든 의심과 질문들을 반납하고
   익명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
  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
   세상에 한 번, 휙-
   사소하게 지나가야 한다
 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끝끝내
   우리는 배경으로 남아야 한다.

[출처] 엑스트라 / 정해종|작성자 백야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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문둥이

카테고리 없음 2015. 6. 28. 07:02

  문둥이

                  서정주


해와 하늘빛이

문둥이는 서러워

보리밭에 달 뜨면

애기 하나 먹고

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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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아무래도 원장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구만. 원장은 지금 나한테까지도 겁을 먹고 있는 얼굴이거든. 

그게 탈이야. 원장이 그렇게 겁을 먹으면 일은 크게 빗나가지. 아까도 말했지만 문둥이는 누가 겁을 먹은 걸 보면 공연히 심술이 사나워져서 점점 더 추악하고 난폭한 꼴을 보인다지 않았는가 말야. 

그 주막집 색시 얘긴데, 생각해보면 그 여자도 아마 겁을 먹고 날뛰었기 때문에 엉뚱한 화를 부르게 된 꼴이었지. 겁을 먹은 걸 보니까 난 점점 더 심술기가 동했거든. 문둥이끼리라면 절대로 서로 겁을 먹을 일은 없으니까 말야. 문둥이들은 그걸 알고 있지."


당신들의 천국, 이청준, 문학과지성사 273p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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원장은 그런 황 장로를 알고 있었다.

그는 원장보다도 더 줄기찬 인내로 자꾸만 무력하게 허물어져가는 자신의 의지를 지탱해내려 하고 있었다.

그것은 노인이 원장에게 한 말 가운데에 은연중 암시되고 있었다. 


당신들의 천국, 이청준, 문학과지성사 275p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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